최성민 소장 “차 덖는 건 냉한 성미 때문 아니다”

 
최성민 다도보존연구소장 본지 기고
전통덖음차제다교육원 혜우 스님 비판
녹차에 대한 오해·음해에 빌미 줄 뿐
제다 관건은 습기 적절히 제거하는 일
‘다경’ ‘동다송’ 등 관련 내용도 그것
최성민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장
최성민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장

최성민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 소장이 법보신문 5월9일자에 게재된 ‘지리산 전통덖음차제다교육원장 혜우 스님’ 기사와 관련해 이를 비판하는 기고문을 보내왔다. 철학박사로 곡성 산절로야생다원 대표를 맡고 있는 최 소장은 ‘승복 입은 차인이라면 차의 본질 제대로 알아야’라는 기고를 통해 “‘(寒한) 성미를 바꾸기(다스리기) 위해 여러 번 덖는다’는 식으로 단언해 버리면 녹차에 대한 오해와 음해에 영원히 빌미를 줄 뿐 아니라 차의 정체성 자체가 심히 왜곡돼 버린다”고 지적했다. 편집자

나는 오래전부터 순수 야생다원을 조성하고 제다를 해온 차인이자 다도 관련 논문(‘한국 수양다도의 모색’)을 발표한 차 학인으로서, 지난 5월8일자 법보신문에 난 ‘지리산 전통덖음차제다교육원장 혜우 스님’ 제하의 인터뷰 기사에 차의 성미 및 제다의 원리, 차의 기능 등에 관해 간과할 수 없는 왜곡이 있어서 반론한다.

위 기사가 난 때가 제다철이어서 인터뷰이가 말하는 차와 제다에 관한 내용이 관심을 끌법했다. 그렇더라도 승복의 위력을 빌어 차를 말할 때는 검증할 수 없는 자신의 주관을 진리인 양 과포장해선 안 된다는 말이다.

위 인터뷰 기사에서 차에 관한 지식과 한국 차문화를 왜곡하는 대목은 “전통 제다법에서 한약 법제의 ‘구증구포’를 언급한 건 찻잎의 한(寒)한 성미를 평(平)하게 하여 누구나 마실 수 있는 차를 만들기 위함이었음을 혜우스님은 간파했다”는 대목과 일반인들이 차를 마시면 얻을 수 있는 단 한 가지를 ‘소통’이라고 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견해는 전적으로 차의 정체성과 차문화의 핵심인 다도의 수양론적 기능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차의 경전인 ‘다경’ 첫머리에 “茶之爲用 味至寒 爲飮最宜精行儉德之人…”(차의 쓰임은 성미가 매우 寒하여 정행검덕한 사람이 마시기에 가장 좋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에 나오는 ‘味至寒’을 ‘차의 성미가 매우 차다’라고 오역하는 경우가 있다. 위 인터뷰에서는 이 ‘미지한’과 연관하여 ‘한한 성미를 평하게 다스리기 위해’ 열을 가해 덖는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어지는 멘트를 보면 그가 차의 ‘한한 성미’를 거론한 것은 “차(녹차)는 속이 냉한 사람이 마시면 안 된다”는 터무니없는 속설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즉 얼마 전부터 차, 특히 한국 덖음 녹차가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녹차는 몸을 차게 하고, 보이차는 몸을 따뜻하게 한다”는 풍문이 떠돌았는데, 차의 한한 성미를 다스린다는 것은 그런 풍문을 인정하여 녹차의 한한 성미를 그렇지 않게 바꾸어서 몸이 찬 사람이 녹차를 마셔도 된다(누구나 마실 수 있는 차)는 의미를 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차는 한(냉)하다”라는 말이 과연 맞느냐이다. 이 말에서 차(특히 녹차)에 대한 온갖 부정과 음해가 시작되므로 적어도 차인이라면 이 말의 맥락을 올바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못하고 위 인터뷰처럼 “(한한) 성미를 바꾸기(다스리기) 위해 여러 번 덖는다”는 식으로 단언해 버리면 녹차에 대한 오해와 음해에 영원히 빌미를 줄 뿐만 아니라 차의 정체성 자체가 심히 왜곡돼 버린다.

예로부터 차는 마음의 안정뿐 아니라 건강해에도 대단히 좋아 불로초를 여겨졌다. 그림은 김후신의 ‘삼선전약’ 지본담채.(간송미술관 소장).
예로부터 차는 마음의 안정뿐 아니라 건강해에도 대단히 좋아 불로초를 여겨졌다. 그림은 김후신의 ‘삼선전약’ 지본담채.(간송미술관 소장).

‘다경’의 위 대목에서 ‘미지한’을 “성미(또는 맛)가 지극히 차서…”라고 해석하면 안 된다. 맛은 오미, 즉 달고 쓰고 짜고 맵고 떫은 것이지 ‘찬 맛’은 없다. ‘미지한’은 그 뒷구절 ‘최의정행검덕지인’을 설명하기 위해 쓴 차의 덕성을 표현한 말이다. 즉 여기에서의 ‘한’은 정(精), 검(儉)의 의미와 맥락이 통하는 말로서 우리말로 풀자면 ‘차분하다’ ‘침착하다’ ‘성실하다’ 정도의 의미이고, 미(味)는 ‘맛’이 아니라 ‘동다송’에 나오는 ‘기미(氣味)’ 정도의 의미로서 차의 기질을 의미한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한중일 삼국 차계에서는 ‘다경’의 이 대목을 빌어 중국 다도정신을 ‘정행검덕’이라고 한다. 즉 차의 ‘미지한’이라는 덕성이 다도를 견인하는 핵심요소로서 차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덕성을 바꾸어 버리려고 여러 번 뜨거운 솥에 넣어 덖는다? 제다를 왜 하는지, 차가 차인 까닭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차를 덖는 것(제다)은 차를 오래 보관해두고 오히려 ‘미지한’의 성미를 더 효과적으로 음미할 수 있도록 습기를 제거하는 일이 아닐까?

이때의 ‘한(寒)’은 성미 또는 기미로서 ‘차다’는 온도 개념이 아니라 음·양의 음에 해당하는 의미이다. 음·양은 대대(待對)적 개념이고 음 안에도 양이 들어있어서 음과 양 자체만 두고 차거나 뜨겁다고 할 수는 없다. 차가 사람 몸을 냉하게 하는 음료라면 열이 많은 사람은 늘 차를 마시는 게 좋고 여름엔 차를 많이 마시면 냉장고나 에어컨이 불필요할까? 또한 ‘차를 덖는 이유’가 그렇다면 뜨거운 물에 우려 차를 마시는데 왜 몸이 차가워질 것을 걱정하는가?

“전통 제다법에서 한약 법제의 구증구포를 언급한 건 ‘찻잎의 한한 성미를 평하게 하여 누구나 마실 수 있는 차’를 만들기 위함이었다”는 말엔 또 다른 왜곡이 있다. ‘구증구포’라는 언급은 이유원의 시를 인용한 다산의 시에 잠깐 나온다. 그 좌우 맥락을 살펴보면 ‘구증구포’는 차의 센 기운을 덜기 위한 방법으로서, ‘누구나 마실 수 있는 차’를 만들기 위한 제다법이 아니라 유배객으로서 위장병이 심했던 다산이 차를 약으로 쓰기 위한 제다법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즉 위가 약한 다산의 위산 과다 분비를 자극하는 차의 성분을 덜어내기 위한 방법이었으리라.

일반인들이 차를 마시면 얻을 수 있는 ‘단 한 가지’를 ‘소통’이라고 한 것은 차의 정체성이 무엇이며, 현재 한국 차 쇠락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차인이라면 어울리지 않는 나이브한 견해이다. 물론 “차나 한 잔 하자”라는 말 속에 ‘대화’ 또는 ‘소통’의 의미가 들어있다. 그러나 “차나 한 잔 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마시는 음료수는 커피, 오미자즙, 쌍화탕 류가 아닌가. 오히려 만남을 위해 ‘한 잔 하자’는 말에 따르는 마실 거리는 막걸리나 소주가 적격이다. 즉 차를 ‘소통’과 이미지 연결시키는 것은 차를 일반 음료수의 반열에 놓아 차의 차별성과 정체성을 깎아내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커피와 서양음료의 상업주의 쓰나미 속에서 차의 차별성과 뛰어난 정체성을 알지 못하고 차를 한 차원 낮은 일반 음료수의 반열에 놓는 것이 한국 차 쇠망의 서곡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차의 정체성은 동양사상 기론(氣論)에 입각한 한국의 ‘수양 다도’를 견인하는 차의 기(氣)로서 다향(茶香)이고, 제다의 관건은 ‘찻잎의 한(寒)한 성미를 평(平)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 찻잎이 품고 있는 자연의 청기(淸氣)인 차향을 최대한 잘 보전하여 보관하기 위해 습기를 적절히 제거하는 일이다. ‘다경’, ‘동다송’, ‘다법수칙’의 제다 관련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다. 찻잎의 성미(좋은 차향과 더불어 우리 몸에 적절히 이입되는 한(寒)한 기질)가 차의 핵심인 다도의 수양 기능을 수행하는데 그 성미를 바꾸어 버리기 위해 제다를 한다면 그런 차를 왜 마시자는 것인가? 적어도 템플스테이의 다도체험 등 불가의 찻자리에서는 한재(寒齋) 이목(李穆) 선생과 초의선사가 전한 차의 정체성과 한국 다도의 의미에 대해 바르고 책임 있는 견해들이 표출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