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부터 남도 차산지에서 관·(·) 중심으로 옛 차 복원 움직임이 성행하고 있다. 이른바 장흥 청태전, 보성 뇌원차의 복원이 그것이다. 옛 차 복원은 주로 장흥군과 보성군 등 지자체가 적쟎은 돈을 학계에 연구비로 주어 추진하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그 결과 해당 지자체의 전통차농업이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되는 데 중요한 자료 역할(장흥 청태전)을 한 데 이어 보성 뇌원차 복원의 경우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시키는 자료로도 활용되고 있다. 2019()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박동춘 소장은 고려시대 단차(團茶)를 재현했다고 하면서 서울에서 몇 차례 고궁 시음회를 열기도 했다. 문제는 이런 옛차 복원이 한국 제다와 차의 질 및 한국 차문화 발전에 어떤 영향을 주느냐이다.

 

옛차 복원 및 재현 움직임은 관과 학 또는 차 관련 학자가 주동하여 공적인 권위를 갖는다는 점과 이 때문에 매스컴에 널리 보도되어 사회적 영향력을 갖는다는 점에서 현행 한국 제다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 청태전의 경우 수 년 전부터 장흥군의 대대적인 홍보와 지원으로 청태전 제다인들이나 관계자들에겐 높은 수준의 차로 자인되고 있으며, 2019년 고려시대 단차 재현은 차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시대의 고급차라는 선전 문구 등으로 관심을 끌었다. 20206월 보성군은 뇌원차 복원 사실을 발표하면서 고려 최고의 명차로 다른 전통차와 차별성을 지녔기에 그 원형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일은 역사·문화적으로 큰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옛차 복원 움직임이 현행 한국 차 제다에 몰고 올 파장은 우려할 만하다. 가장 큰 걱정은 그렇쟎아도 지지부진한 녹차 제다가 위축되어 덖음 녹차 위주인 한국 차문화와 차산업이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근래 정기적으로 열리는 대규모 차 행사장에서는 녹차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갈색 산화차류가 들어서 있다. 이는 보이차의 범람과 보이차 맹종주의가 빚는 비극적인 현상인데, 옛차 복원 움직임이 이러한 녹차 죽이기를 가속시킬 수 있다. 청태전과 뇌원차 등 관학 합동으로 복원된 차들은 모두 보이차 열풍에 현혹돼 발효차류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한국 전통 녹차는 사라지고 녹차 음용에 따른 수양론적 다도문화는 그 기반을 잃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차학계는 옛차 복원의 유용성을 잘 살피고 분석하여 그 잘잘못을 학구적 양심에서 지적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옛차 복원 주체들이 차학계 관계자들이어서 현재로서 그런 기대는 무망한 일이다. 필자는 20년 제다 경력과 한국수양다도를 전공한 차인이자 차 학인으로서 감히 말하고자 한다. 지금 복원 또는 재현했거나 하고자 하는 옛차들은 박물관에 자료로 보관할 역사적 유물은 될 수 있으나 오늘날 음용할 차로서는 활용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이 차들은 모두 당·송대(·宋代)에 만들었던 떡차(餠茶)류 또는 단차(團茶)류이다. 이 떡차와 단차류도 원래 녹차류였으나 한··일 삼국의 제다 발전과정에서 현재의 산화·발효차류와 녹차류 및 말차 등 훨씬 진화된 품질의 차로 탈바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울 한강변 암사동 유적지에는 구석기시대 움집들이 복원(재현)돼 있고, 그 뒤쪽에 고층아파트군이 들어서 있다. 그 암사동 움집은 구석기시대인들의 원시적 삶을 보여주는 자료는 될지언정 인근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그곳이 더 좋다고 갑자기 몰려가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문화는 시대와 환경의 소산이어서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맘모스나 공룡을 복원해 놓으면 오늘날의 환경에 적응해서 다른 생물체와 유기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차 생산 환경이 좋은 중국에서 당대(唐代) 육우(陸羽)가 쓴 다경茶經에 그 제다법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나오는 청태전과 같은 떡차류 등 다양한 옛차를 복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청태전이나 뇌원차와 같은 떡차류·단차류는 원래 당나라 육우가 다경을 썼던 시절 유행했던 녹차류 지향의 잔영(殘影)이다. 떡차류·단차류 제다는 찻잎을 찌는 일(蒸製)에서 시작된다. 찌고 좀더 정밀하게 찧어서 덩어리로 만들어 말린 것이 떡차이고, 조잡하게 찧거나 잎차를 긴압하여 덩어리로 만든 게 단차다. 이렇게 만든 목적은 차의 원형(녹색과 카테킨 등 차의 성분)을 최대한 유지시키면서 보관과 운반을 편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즉 어떻게 하면 차의 성분을 잘 보전하면서 저장하고 운반하느냐가 제다의 관건이었다. 차를 찐다는 것은 오늘날 제다 용어로 살청殺靑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차의 원색인 녹색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과학적으로는 찻잎에 들어있는 카테킨(폴리페놀) 산화효소의 작동을 정지시켜서 카테킨의 산화를 막아 카테킨 성분을 보존하고자 하는 일이었다. 이것을 찧어서 떡으로 만든 목적은 보관과 운반의 편의를 위한 것이고, 증배(蒸焙, 쪄서 말림)하거나 떡으로 만든 뒤 말린 것은 찻잎의 수분을 제거하여 가수분해 및 미생물 발효를 막아 녹차의 성질을 유지시키면서 저장과 운반의 편의를 기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했더라도 건조와 포장술이 미흡해서 후 산화·발효가 진척되어 황차 청차 흑차와 같은 황갈색 차류로 변하여 갔다. 당대(唐代) 육우(陸羽)가 쓴 다경에는 당시 가장 선호되는 다완이 청자인 월주요였는데, 그 이유로는 녹색에서 황갈색으로 변해버린 차탕색을 녹색으로 보이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옛차 복원이 성공적인 일인지는 그 차들의 향과 맛, 그리고 성능이 말해줄 것이다. 장흥 청태전의 경우 청태전 제다에 참여하고 있는 차농가들이나 이를 지원하고 있는 지자체 관계자들 및 복원사업에 참여한 목포대 차학과 관계자들이 과연 어떤 자가평가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청태전을 일본의 국제 차품평대회에 나가 상을 받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행사에서의 상은 참여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경우도 있으므로 수상경력이 차 품질에 대한 절대적인 평가기준이 되기엔 미흡하다. 2019년에 청태전이 국가주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된 사실은 청태전 복원의 한 효과 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한 해에 5억원 씩 연 15억원의 국가 지원금을 받게 되었으니 청태전 복원사업으로 혜택을 입은 사람들에겐 좋은 일이다. 그러나 국가농업유산 지정에는 다양한 요인이 작용하는 것이어서 청태전이 품질이 전적으로 평가를 받은 것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지자체의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홍보전략이 평가를 받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청태전의 품질이 좋다면 더 이상 지자체의 산지원이 없어도 한 번 청태전을 마신 사람들이 호평을 하며 다시 청태전을 찾는 일이 빈번해야 한다. 내 기억엔 옛 기록에 불회사 등 남도 일대 차산지에 사찰에 청태전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차가 있었다는 기록 외에 그 차의 향이나 맛이 뛰어났다는 내용은 없었다.

 

옛 청태전에 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은 朝鮮(모로오까 다모쓰·이에이리 가즈오 공저, 김명배 번역, 1991, 圖書出版 保林社)에 나와있다. 저자 중 한 사람인 이에이리 가즈오(家入一雄)1939223일 강진읍 목리 유대의(劉戴義) 씨 집에서 청태전을 마셨는데, “담박한 맛으로서, 특별히 다른 맛은 나지를 않았다는 내용이다. 또 이튿날 다산초당이 있는 만덕리에 찾아가서 다산의 외척 후손인 윤재주(尹在周) 씨를 만나 청태전에 관한 얘기를 들은 것이다. “청태전은 일명 병차(餠茶, 떡차)라 해서 작설을 딴 뒤의 잎으로 만든다. 품질이 나쁜 것이다. 4,5년 전까지 이 마을에서도 만들었다. 백 개쯤 새끼에 꿰어서 8~10전에 팔고 있었다. (지금은 없다. 지금 있는 것은 작설차라고 한다)” 1939년 경 강진 백련사와 다산초당이 있었던 만덕리 일대에서는 이미 청태전이 폐기되고 더 품질이 좋은 작설차(잎차)가 제다 생산되고 있었다. 이에이리 가즈오는 이 내용을 전라남도 해안지방의 청태전 탐색기라는 표제로 소개하면서 다경에 있는 당나라 차의 조사를 진행하여 일반에게 소개할 수가 있다는 것은 매우 기쁘다고 하면서 야릇한 호기심을 보이고 있다. 1천 여년 전 당나라 차로서 총독부 일본인 관리의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청태전을 오늘날 많은 예산을 들여 복원사업을 벌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뇌원차의 복원은 청태전 복원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청태전 복원 주체인 장흥군과 인접하여 남도 차문화 주도권 경쟁을 벌이는 보성군이 사업예산을 투입하고 사업추진은 청태전 복원사업을 했던 목포대 차학 관계자들이 맡았다. 보성군은 뇌원차 복원 이유와 목적에 대해 고려 최고의 명차로 다른 전통차와 차별성을 지녔기에 그 원형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일은 역사·문화적으로 큰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고려시대 뇌원차의 제다법이나 뇌원차의 차향과 품질이 어떠했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고려 최고의 명차라는 근거가 무엇이며 다른 전통차와 다른 차별성이 무엇인지가 궁금하다.

 

또 박동춘 소장의 고려시대 단차 복원은 이른바 연고차(硏膏茶)류의 복원으로 보이는데, 연고차는 차의 진액을 빼낸 잎을 가루내어 덩이차로 만든 것이다. 이것은 차를 차의 성분이 내는 효능으로써 마시는 것이 아니라 원래 송대의 귀족 차 호사가(好事家)들의 행다(行茶) 겉멋부리기 차 사치를 위한 공납차(貢納茶) 종류와 같은 것이었다. 연고차는 워낙 제다과정이 복잡하여 민폐를 끼친다고 해서 명태조 주원장이 칙령으로 산차(散茶)를 등장시키는 계기로 삼았다. 박 소장의 고려시대 단차 복원이 이러한 연고차류의 복원이었다면 차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고려)시대의 고급차라는 명분 보다는 연고차의 폐기 이유가 먼저 고려되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