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선선한 갈바람과 함께 차를 들며 명상하기에 좋은 시기에 접어들고 있다. 때에 맞춰 전국에서 각종 차 행사가 활발히 열릴 것이다. 차인들이나 차 관련 학계에서 국가 예산 지원을 받아 대형 차 행사를 여는 것은 대중에게 차의 우수성과 차문화의 중요성을 널리 인식시켜 차생활의 대중화 및 차 시장 확산을 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행사가 차 상업주의에 지나치게 매몰되거나 현실과 유리된 채 허공을 향하게 되면 오히려 차에 대한 혼란과 불신을 야기하여 대중을 차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할 우려가 있다.

차 행사 차 학술회의 차 상업주의에 매몰

지난 해와 올해 상반기 차 관련 행사나 차 학술회의들의 양상을 보면 후자의 측면이 강하다. 차 관련 행사들이 규모가 커지고 전에 없던 차 행사들이 지방 곳곳에서 새롭게 열리고 있으나 대부분의 차 관련 행사들이 차의 본질이나 현재 한국 차가 처한 위기 상황 진단에 입각한 내용 보다는 겉치레 행사나 차의 본질과 무관한 부대 행사 또는 외래차 홍보장 역할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여느 차 행사장을 가보더라도 한국 차의 원형이자 다산과 초의가 창발하여 물려준 한국 차의 원형인 순수 녹차는 찾아보기 어렵고, 중국산 발효차류와 맹목적으로 그것을 쫒는 한국 유사 발효차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국차학계 현실과 유리된 탁상공론

차 학술대회도 사정이 딱하고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한국에서 가장 크고 모델격인 한국차학회의 연례 학술대회 양상을 보자. 한국차학회의 지난해 추계 학술대회 주제가 ‘세계 속의 한국 차 – 1. 4차 산업혁명시대 차 산업, 2. AI시대와 차문화’였고, 올해 춘계 학술대회 주제가 ‘중국 차문화의 과거, 현재, 미래’였다. 이는 현재 한국 차와 차문화가 처한 현실과 매우 동떨어진 것들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현재 한국의 녹차는 커피와 보이차 상업주의에 밀려 설 자리를 잃고 자취마저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또 간혹 행사장에 등장하는 한국 녹차류는 제다법의 혼란으로 인해 향과 맛이 제 각각이다. 한국 차가 처한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이 마당에 ‘4차 산업혁명과 차’나 ‘인공지능 시대의 차문화’를 운운하는 학자들의 행태가 한국 차의 현실적 대안 마련과는 멀어도 한참 먼 탁상공론임을 잘 알 것이다. 더구나 ‘중국 차문화의 어제, 오늘, 내일’을 걱정할 만큼 한국 차 학계가 한가한가?

강진차문화학술대회 한국차 정체성 고민

물론 현행 차 관련 학술대회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지난 8월 30일 전남 강진에서 열렸던 ‘제4회 강진 차문화 학술대회’(강진다인연합회와 강진신문 주최)는 현장감 있고 실질적이고 실효성 있는 주제로 구성되었다. 즉 주제가 ‘백운동과 차문화’였는데, 다산이 유배지 강진에서 최초로 한국의 제다를 일으킨 일 및 한국 최초의 시판 대중차인 백운옥판차(금릉월산차)의 역사성과 미래가치를 논하는 자리였는데, 현장에서 직접 차를 만들며 한국 차의 정체성과 나아갈 길을 고민하는 이들의 생생한 증언의 자리여서 여타 차 관련 학술대회의 탁상공론과는 비교가 되었다.

차의 생태와 제다 연구 학인 드물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한국 차의 위기는 한국 차의 정체성 미비 및 그에 따른 제다의 혼란 문제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차가 그런 문제로 갈팡질팡하는 와중에서 커피와 외래차 상업주의가 한국 차시장을 ‘식민지화’한 것이지, 순서가 그 역은 아니다. 한국 차의 정체성 확립과 그 정체성 구현을 위한 제다의 문제 해결책 제시는 일차적으로 차 학계의 임무이자 사명이어야 한다. 한국의 차 학계가 오늘날 한국 차가 처한 위기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무능한 것이고, 알면서도 모른 채 한다면 학구적 ‘양심불량’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한국 차 학계에 차학을 제대로 전공하거나 한국 차의 원형적인 현장에서 차나무와 씨름하며 차의 생태와 제다를 연구하고 고민하는 학인들이 드물고, 그들이 기존 차 학계의 ‘카르텔’에 막혀 발언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기도 하다. 또 이런 비판에서 제외될 수 없는 대상이 차 문화재 당국이다. 문화재청은 지난 2016년 ‘전통 제다’를 국가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그후 문화재청이 한국 차의 정체성 및 그와 관련된 제다의 혼란 해결을 위해 어떤 발전적인 일을 했거나 작은 성과라도 얻었다는 증거는 없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한국 차의 정체성 확립과 제다의 표준 마련에 한국 차 학계와 차인들이 발벗고 나서야 한다. 한국 차의 정체성이란 게 별 게 아니다. 일찍이 다산과 초의가 다 만들어 제시한 덖음 또는 증제 녹차와 수양 다도이다. 한국 차의 제다는 그런 정체성의 차를 만들기 위한 방법이어야 한다. 다산은 구증구포와 삼증삼쇄의 떡차를 만들고 강진의 금릉월산차와 백운옥판차는 이를 덖음 녹차로 계승하였다. 또 초의는 『동다송』에서 덖음 녹차(잎차)의 향, 제다법, 음다의 수양법을 더욱 명확히 제시하였다. 흔히 혼동하지만 다산이 만든 증제 떡차나 청태전류는 당대唐代 육우가 만들었던 증제 떡차와 마찬가지로 애초에 모두 녹차류이다. 원래 황차류와 보이차류는 떡·잎차의 녹차가 보관상 문제로 산화, 가수분해. 또는 곰팡이발효되어 변질된 2차 부산물이다. 다산과 초의가 끝까지 ‘녹차’에 집착한 이유는 녹차야 말로 차의 3대 성분인 카테킨, 테아닌, 카페인이 가장 적절하게 함유되어 심신의 건강과 수양에 최적의 차이기 때문이다.

차다운 차를 만들어낼 때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 10대 수퍼푸드’에 다른 차가 아닌 녹차가 드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차가 초의가 말한 진향, 순향, 청향, 난향의 ’차 다운 차‘로서 정체성을 갖추고 한국의 제다가 그런 차를 만들어내는 표준을 마련할 때 한국의 차는 ’세계의 차‘로서 오늘의 위기를 돌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백운옥판차의 제다법을 배웠다는 차의 대가 수산 스님은 “찻잎을 딸 때와 완제된 차의 향이 같은 차가 ‘차 다운 차’...”라고 일갈했다. 왜 오늘 우리가 위기에 허덕이면서도 선현들의 외침에 귀 기울이지 못할까?

 

-성균관대 유학대학원 생활예절·다도학과 초빙교수.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 소장. 최성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