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차의 인기를 업고 차의 원조 나라인 중국의 차가 물밀듯이 몰려오고 있다. 아예 중국차를 배우러 중국이나 대만에 유학가는 사람들도 있고, 이미 그 유학에서 돌아와 중국차의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고 있고 중국차 제다법으로 차를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값싸고 개성있는 중국차의 난입은 커피의 홍수와 함께 한국 차 몰락의 원인이라고 한탄하는 목소리도 있고, 한참 앞서있는 중국차를 열심히 배우는 것은 손해날 일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런 한편에선 보이차 전문 매장이 줄지어 들어서고 보이차에 관한 강의가 정기적으로 전문적으로 열리는 모임도 있다. 보이차가 골동품처럼 해마다 가격을 더해가면서 음료용이 아니라 보관용으로 다뤄지는 경향도 있다. 그러다 보니 ‘중국차 사대주의’ 우려도 나오고 있다.

 

나는 한겨레신문 기자이던 2001년 3월 ‘우롱차’인 ‘무이암차’로 유명한 중국 복건성 무이산 무이구곡 일대 차 산지 취재를 갔었다. 그곳에서는 대홍포, 백계관, 수금귀 등 향이 좋은 반발효차들이 생산된다.

 

나는 또 곡성 산절로야생다원이 찻잎을 생산해내기 시작한 2012년 3월 보이차 명산지로 유명한 중국 운남성에 ‘보이차 견학’을 갔었다. 그곳에서는 또 최고급 보이차의 대명사인 ‘노반장’이 나는 곳으로, 수십년~수백년 된 고차수古茶樹가 숲을 이루고 있는 있어서 자연산 고차수 찻잎만으로 차를 만든다.

 

한국에 중국차가 물밀려드기 시작한 때 중국 수입차의 대명사격인 우롱차와 보이차의 명산지를 들러본 것인데, 한국 차인과 제다인들이 참고하도록 견학기를 싣는다. 먼저 무이산 반발효차 산지 방문기를 적는다. 해마다 티월드페스티벌을 주최하는 000씨와 무임암차 수입상인 김00씨 등 ‘차피아’ 멤버들과 함께 한 여정이었다.

 

무이산은 중국 南宋代 성리학의 완성자 주자(朱喜, 1130~1200)가 학문을 연구하며 기거했던 곳으로 ‘주자학의 산실’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주자는 무이산에서 손수 차나무를 재배하고 차를 만들어 마시며 유학에 ‘성즉리’라는 철학적 이론틀을 추가하여 성리학으로 발전시켰다. 주자는 무이산 일대의 절경을 읊은 ‘무이구곡’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이는 나중에 퇴계 이황이 ‘도산구곡가’를 짓는 데 영향을 미치는 등 무이산의 산 기운을 널리 퍼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주자는 또 ‘주자가례’를 창안했는데. 가례에서 조상께 차를 올려야 함을 강조했다.

 

무이산 일대는 넓고 깊은 암반 지형과 고온다습한 기온으로 인해 오래전부터 향이 좋은 차나무가 잘 자랐다. 여기서 난 찻잎으로 만든 ‘무이암차’는 중국의 10대 명차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무이산은 산 전체가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서 무이한 풍경구 70평방킬로미터 남짓되는 정암차구역(正岩茶區域, 무이산 안에서도 가장 좋은 차가 생산되는 구역)에서 생산되는 여러 가지 반발효차(청다 또는 우롱차라고 함)를 두루 ‘무이암차’라고 한다. 이에 비해 ‘무이차’라는 것은 정암차 구역에서 생산되는 청차를 제외한 모든 차(녹차인 용봉단차, 홍차인 정산소종 등)는 그냥 ‘무이차’라고 한다.

 

애초에 무이산에서는 반발효차가 아닌 무이차만 났었다. 몽골족의 원나라때는 御茶院을 조성하여 대대적으로 차농사를 권장했다. 그러나 淸朝가 들어서면서 원나라 차문화의 흔적을 말살시키자 무이산 차농들이 자구책의 돌파구로써 제다방법을 달리하여 만들어 낸 것이 반발효차인 ‘무이암차’이다. 그리하여 400여 년 전에 반발효차인 ‘무임암차’가 나와 중국 차문화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고 복건성 차인들이 복건성과 위도가 비슷한 대만으로 건너가 대만의 반발효차인 고산차를 탄생시켰다. 이로써 동방의 차문화는 녹차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다채로운 풍미의 발효차의 경지로 승격되게 되었다.

 

이러한 기본 지식을 배경으로 깔고 안내인을 따라 무이산 정암차구역으로 들어갔다. 천길 낭떠러지 암벽들로 둘러싸인 폭 20미터~50미터 안팎의 협곡들 사이사이에 작은 평지 또는 계단식 차밭이 펼쳐졌다. 한창 찻잎을 따던 때라 막 피어난 싱그러운 찻잎들이 선경을 이루고 있었다. 대엽종 찻잎은 한국의 소엽종 찻잎에 비하여 크기가 비교가 되지 않았다. 두 세 잎이 한 손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찻잎의 향을 맡아보니 오룡차에서 나는 꽃향기 과일 향기가 그대로 배어났다. 내가 종래 가지고 있던 ‘중국 차에는 무슨 향료를 넣지 않나?“하는 의문은 이것으로 씻어졌다. 한참을 40분 남짓 걸어가니 협곡은 끝이 없었고 군데군데 암벽에 쓰인 ’차 유적‘ 관련 붉은 글씨와 일꾼들이 마셨던 우물의 흔적들이 보이더니 이윽고 높다란 곳에 지어진 정자와 함께 그 옆에 서너 그루의 오래된 차나무들이 석축이 쌓아진 단 이에 모셔져 심어진 모습이 보였다. 그 유명한 대홍포 어미나무(母樹)라고 했다. 해마다 이곳에서 개산제 행사를 연다고 했다. 대홍포라는 이름에는 유래가 있다. 옛날 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00에 가다가 심한 배탈을 얻었는데, 무이산 협곡을 지나면서 우연히 따서 씹은 풀잎의 효능으로 배탈이 낫게 되어 과거 시험에 무난히 합격을 했다. 그런데 과거 시험 직후 황후가 비슷한 병이 난 것을 알고 그 풀잎을 알려 황후의 병도 낫게 되었다. 그 풀잎이 대홍포 찻잎인데, 황제가 그 차나무에 황제의 옷인 대홍포를 내렸다는 것이다.

 

우리 일행은 나중에 무이암차 제다공장으로 갔다. 공장 안내원은 제다공장 정문 앞에 있는 ‘농약검출기’를 특별히 강조해 보여주었다. 중국에서 찻잎의 농약 잔류량 문제에 퍽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것이다. 공장안에서는 위조-요청-량청-난청-살청-홍배의 전과정을 볼 수 있었다. 공장 견학 뒤엔 무임암차 원료의 대량 공급처인 재배차밭을 견학했다. 한국의 보성다원처럼 생긴 차밭은 끝이 없이 펼쳐지고 한 가운데에 커다란 저수지가 조성돼 있었다. 차밭 급수와 수증기 공급용이라고 했다. 차밭 고랑 사이마다엔 2세 차나무들을 심어 기르고 있었다. 기존의 차나무가 30년이 되면 일제히 뽑아 버리고 2세들로 갈아치운다고 했다. 한국 남도의 어느 차 산지에서 ‘천년된 차나무의 천년차’를 내세우는 이른바 ‘오래된 차나무’ 신앙이 생각났다. 한쪽 구석엔 커다란 축사가 있었는데, 바닥을 1미터 정도 높여 지은 축사에서는 바닥 아래로 가축들의 배설물이 배출되어 미리 깔아놓은 건초더미와 함께 자연 퇴비가 되고 있었다. ‘비료+농약’ 재배를 벗어나 ‘유기농’으로 가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2012년 3월에 갔던 중국 운남성 보이차 산지 방문은 한국 차계의 보이차 환상과 보이차 허영주의를 깨주기에 충분했다. 일행은 차 업계의 선두주자의 시이오 급 간부, 근래에 10만평의 차밭을 조성한 남도 한 지자체의 차담당 책임자, 전국에서 전통 찻집을 하거나 차모임을 운영하는 차인 등 15명이었다. 모두 차에 일가견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보이차에 대한 기대도 갖고 있었다.

 

일행은 곤명 공항에 내려 운남성 서쌍판납으로 날아가서 다시 맹해라는 공장 근처에 일주일 동안 머무르며 공장과 찻잎 산지 등지를 오가며 지냈다. 찻잎 산지는 두 곳을 갔는데 애초의 목적지는 ‘노반장’이라는 곳이었다. ‘노반장’은 같은 이름의 상표로서 한국에서 최고의 보이차로 알려진 ‘노반장’의 찻잎 산지이다. 일행 모두는 노반장에 온 것만으로도 놀라고 즐거운 표정들이어서 사진찍기에 바빴다. 노반장엔 800년 이상 된 차나무를 비롯한 오래된 차나무古茶樹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노반장은 비포장 황톳길을 덜컹거리며 가야 하는 산족 마을로 우리 일행의 숙소가 있는 맹해에서 자동차로 한나절을 가야 하는 오지였다. 마을은 100여 가구가 집단을 이루고 있었는데, 집집마다 작은 차덖음 부뚜막과 찬 건조대가 마련돼 있었다. 수제차를 만들어 협동조합 같은 데로 납품하는 것 같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이차 산지여서인지 고샅엔 외제차들이 서 있었다.

 

마을 주변엔 고차수가 늘어서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대바구니나 삼베 망태기를 등에 지고 찻잎을 따고 있었다. 대바구니와 삼베 망태를 쓰는 것은 딴 찻잎들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리라. 마을 아낙네들은 3미터 이상씩 되는 차나무에 올라가 찻잎을 땄다. 차나무는 오래된 가지를 톱으로 잘라준 것이 많았다. 절단된 부위에서는 어김없이 새 가지가 올라와 새 순을 달고 있었다. 찻잎 상태는 매우 좋았다. 이파리가 넓적하고 두툼하고 겉에서 반들반들 윤기가 흘렀다. 향기도 환상적이었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날이 아무리 가물어도 찻잎이 잘 난다고 했다. 고차수라서 뿌리가 깊은 탓이라고...이에 비해 재배차나무에서는 가뭄때 물을 충분히 주지 않으면 찻잎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재배차와 야생차의 당연한 차이이다.

 

놀라운 사실은 노반장 마을에서 한 해에 제대로 된 ‘노반장’ 햇찻잎이 모두해서 40kg 밖에 나지 않는다는 증언을 들은 것이었다. 한국의 제다기준으로 보면 생찻잎이 1/5로 줄어 완제차가 되므로 노반장 완제차는 한 해에 8kg(100g 짜리 덩이차 80개)가 나는 셈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한 해에 시장에 나오는 노반장의 양은 그것의 열 배도 넘는다는 게 일행들의 말이었다. 가격도 한 덩이에 60만원~수 백 만원에 이른다는 것. 노반장은 너무 인기가 많아서 사들인 사람이 가지고 있기만 해도 해마다 가격이 올라가서 애초에 판 판매상이 가격을 더 얹어서 되사들였다가 다른 사람에게 판다고 했다. ‘마시는 차’가 아니라 손때 묻히고 곰팡이 더 붙여서 가격을 올리는 것이 목적인 ‘골동품’인 셈이다.

 

우리는 노반장에서 돌아와 맹해 운청차창에서 보이차 제다 견학을 했다. 운청차창은 비교적 질높은 보이차 모차(제다직후 아직 발효되지 않은 생차)를 소량 생산하는 차창이다. 노반장 일대에서 가져온 생찻잎을 2시간~3시간 위조-300도 안팎의 기계솥에서 20분 정도 살청(찻잎 온도가 섭씨 80도 이상 안되게 한다고 한다)-유념-햇변 건조(母茶 완성)-틀에 찍기의 순으로 차가 만들어졌다. 이 모차를 오랜 시간을 두면 발효가 계속된다.

 

우리는 그곳에서 20분 거리인 해만차병공사 맹해원료기지로 갔다. 그곳은 운남 일대에서 가장 큰 보이차 ‘대량생산’ 공장으로 ‘노동지’라는 보이차를 생산하는 곳이다. 다른 제다공정은 볼 수 없었고 이미 1차 제다가 끝난 모차를 발효키는 공정을 견학했다. 500평 정도의 공장 안에 보이차 모차가 흡사 퇴비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1미터 이상 두께로 쌓고 물을 뿌린 다음 그 위에 마직 가마니들을 덮어 놓았다. 공장 안이 높은 습도와 열기로 후끈거렸다. 한쪽 구석에서는 10여 명의 인부가 삽으로 찻잎 더미를 헤쳐가면 더미 안과 밖의 찻잎들을 섞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어릴적 시골에서 봤던 퇴비 만드는 방법 그대로였다. 마직 부대를 열어보니 찻잎 더미에 하얗게 곰팡이 사이로 김과 하얀 분말이 푹 새어나왔다. 안내원은 <솥온도 280도~300도에서 살청한 모차를 쌓아 물 뿌리고 가마니 덮어 재우기-1주일 후 하얗게 뜬 모차에 다시 물 뿌리고 섞기(이때부터 뜨기 시작한 보이차는 온도는 섭씨 50도~57도를 유지해야 한다. 60도를 넘으면 탄닌 함량이 과도해진다고 한다)-이후 1주일 마다 섞기만 5회> 하면 42일 만에 ‘속성 보이차’ 원차가 완성된다. 이렇게 하여 일단 하얗게 뜬 보이차를 다른 공장으로 옮겨 여러 가지 원차를 섞는 병배를 한다. 그렇게 하여 어느 정도 맛이 나오면(신맛이 나면 발효가 덜된 것이고, 탕색이 시커먼 색깔이 나면 탄화가 아니라 발효가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생산공장으로 보내 다른 공장에서 온 재배찻잎들과 섞는 재병배를 한다. 맛을 더욱 고르게 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하여 ‘표준 맛’이 나오면 원반처럼 생긴 틀에서 둥근 병차로 찍어낸다.

 

일행은 중국 보이차의 대부이자 ‘보이차 인간문화재’라는 추병량 씨(78살)가 운영하는 해만 차창으로 발길을 옮겼다. 해만 차창은 1959년에 맹해 차창에 입사해 평생 보이차 제다에 종사했던 추병량 씨가 평생 동료인 노국영 씨와 함께 1999년에 세운 회사이다. 두 사람은 ‘중국 보이차계의 살아있는 두 전설’이라고 한다. 해만 차창의 생산 제품은 ‘老同志’라는 보이차다. 추병량 씨는 보이차에 관해 아래와 같이 실증적인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보이차는 200여 년 전 황제에게 봉차(보이차)로 진상한 데서 비롯됐다. 그 뒤로도 (인기는 없었으나) 계속 생산하여 농협을 통해 주로 변방에 보급했다. 당시의 보이차에 대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중단’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양은 적었으나 끊임없이 생산했다. 당시의 보이차는 소량의 生茶를 생산했고 熟茶는 70년대 이후에 발명된 것이다.

 

후발효차인 보이차는 2000년대 이후에 경제발전과 더불어 급속하게 발전됐다. 맛이 몸이 받아들이는 느낌에 좋았고, 특유의 생태환경에 품종이 다양했고 꾸준한 차맛 때문이었다. 한국은 청병(생차)을 선호하는데, 청병은 역사가 400년~500년 된 것이고 숙병은 70년대 이후에 나와 급속하게 발전했다. 청병은 10년 ~50년 간 부단히 변화하고 숙병은 30일~40일간 발효가 진행된다. 운남 농대 연구에서 몇 십 년 발효된 생차는 구감상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숙차의 단기 발효 효과와 같다는 결과가 나왔다. 70년대 이전에는 고수차만 생산했고, 70년대부터는 재배차(무비료, 무농약) 병배한(여러 종류의 찻잎을 섞은) 보이차가 생산되고 있다. 운남 보이차는 건조를 반드시 햇볕에 해야 한다. 기계 건조방에서 강제로 건조한 차는 보이차 구실을 못한다. 미생물 번식과 관련된 문제이다.

 

운남 보이차(대엽종)의 특징은 침출이 약 4%~49%까지 된다는 것이다. 중국 소엽종차는 최고 3% 정도가 침출된다. 그러나 소엽종으로는 보이차가 되지 않는다. 보이차가 되려면 찻잎에 내용물질 함량이 높아야 한다. 중소엽종으로 보이차를 만들더라도 10년~20년 후에는 아무 맛이 없어진다.

 

보이차 유통기간은 80년대 이전엔 규정이 없었다. 지금은 생산일로부터 12개월이다. 생차는 무한정 진화한다. 티벳에서는 100년 둬도 된다. 습한 지역은 그렇지 않다. 보이차의 발효 정점 시점이 어디냐에 대해서 아직 답은 없다. 광동성 생차는 20년~30년 사이, 숙차는 10년~15년 사이가 맛이 최고다. 중국에서 보이차는 습기를 먹으면 끝이다. 보관 장소, 온도, 습도가 중요하다. 대개 50년~60년이 넘은 보이차는 상품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